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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05: Entropy일기/2021년 6월 조각일지 2021. 6. 5. 22:53
오늘 아침에 눈을 떴는데 뜬금없이 '엔트로피'가 떠올랐다.
며칠 전에 과학 다큐를 봤는데 시간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은 엔트로피 때문인데 이 엔트로피란 질서에서 무질서로 가는 것으로 예를 들면 와인잔이 깨질 수는 있지만 그 깨진 와인잔이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그런 걸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우주가 탄생한 빅뱅이 하나의 대폭발이었기 때문에 그 폭발로 인해 우주가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는 것처럼 시간도 엔트로피의 질서대로 흐른다고. 암튼
졸라 뜬금없이 그게 생각났고 나는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는데 화장실에서 핸드폰을 떨어뜨림. 시발 존나 엔트로피의 영향으로 폰 액정이 박살남...그냥 크랙도 아니고 화면 보기 힘들 정도로 자잘한 거미줄 fuck.. 안그래도 핸드폰 얼마전에 떨어뜨렸는데 안깨졌길래 요즘 폰은 참 튼튼해 허허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진짜 핸드폰 왜 맨날 깨먹는거냐 검색해보니 액정 수리비 30만원. 뻐킹헬
아무튼 그 사실이 믿겨지지 않아 잠깐은 이게 꿈인가 했지만 졸라 현실이었고 좀 속상한 상태로 작업실로 향함.
망치와 정을 들고 열심히 돌을 쳤지만 역시나 잘 안깨짐. 토요일이었지만 작업실 앞은 공사 중이었는데 공사하시는 분들 내가 뻘짓하는 거 보고 와서는 다들 한마디씩 하고 가심. 그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해? 이러시면서. 근데 진짜 걱정해주시는 것 같아 좀 감사했음. 쨌든 세월아 네월아 돌을 쪼면서 또 문득 돌을 조각하는 것이야 말로 진짜 엔트로피 그 자체 아닌가 생각함
그렇게 밤톨만큼씩 돌을 쪼아가고 있었는데, 맞은 편에 공사가 진행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이것은 졸라 first world problem이라 내 자신이 한심했지만. 어쨌든 그 감정은 어디서 오는거였냐면, 뭔가 나는 가짜 노동을 하고 있고, 공사를 하시는 분들은 진짜 노동을 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내가 돌을 쪼는 것이 그들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이게 힘든 노동이랍시고 하고 있는데 그것은 결국 내 에고를 충족시키기 위한 노동일테고, 그들이 하는 것은 정말 생계를 위한 노동인게 아닌가? 그리고 다들 50대 후반 혹은 60대로 보이는 것이, 이 고령화 사회 참 문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도 했고. 어쨌든 그들은 정말 heavy duty 일을 하고 있는데 그들 앞에서 내가 내 작업 한다고 팔자 좋게 정질이나 하고 있는게 참 나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 속에서 깎는데 아무리 지랄을 해도 잘 안깨지기도 하고, 점점 날은 더워지고 내 팔은 지쳐가고, 뭔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즐겁게 작업을 하리라 너무 기대하서 그런가. 아무튼 6시가 되어 작업을 끝내고 안으로 들어왔는데 실내에 있는 내 석고 조각들의 디스플레이를 다시 체크하고 싶었다.
그래서 작업들을 하나하나 살피는데 갑자기 기분이 존나 좋아지는 것! 그 시간대가 딱 햇빛이 옆에서 스르르 들어올 때라 자연광이 이쁘기도 했고, 전시 시간이 끝나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 혼자 내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게 뭔가 사치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사실 이미 전시를 했던 것들이라 별 생각 없이 다시 꺼내긴 했지만 작품들을 간만에 보니깐 너무 좋은거 있지...내 작업들 다 왤케 멋져보이나 싶었고 또 다른 환경에서 보니깐 완전 다르게 보이더라. 그것이 조각의 매력이다 그리고 내가 그것들을 만들던 고통과 인내의 시간들이 다시 떠오르면서 뭉클 ㅜ 아무튼 요리조리 자세히 작품들을 살펴보며 너무나도 즐거운 자뻑의 시간을 가졌다. 약간 근래에 본 작품들 중에 젤 괜찮은거 같은 기분이었음그래서 다시 기분이 좋아졌고 작업은 이래서 즐거운거였지 싶었다 그냥 정신없이 몰두하다 보면 나도 내 이상의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도 들었고 항상 그런 마음으로 임해야지만 내가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
어쨌든 오늘 깎은 양. 좆댐… '일기 > 2021년 6월 조각일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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